부끄럽지만 저는 책을 잘 사지 않습니다. 카피레프트 같은 거창한 철학이 있어서가 아니라 집이 좁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내서 산 책을 다 읽지 못 했을 때 느끼는 부담감이 싫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도서관에서 빌려 읽거나 날잡고 대형서점에 가서 다 읽어버립니다. 그래도 책은 늘어갔습니다. 책을 잘 사지 않지만 책이 늘어가는 불편한 진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가수이자 이야기꾼인 이적은 <지문사냥꾼>이라는 책에서 세상 사람들이 읿어버린 우산이 다 모이는 상상의 도시를 상정했습니다. 아마 우리 집 서재는 주인을 잃어버린 책들이 모이는 '잃어버린 책들의 도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전 그런 책을 처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중고서점이 좀 체계화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인터넷 서점 알라딘이 오프라인 중고 매장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짝을 잘못 찾아 고생하던 제 책이 진짜 주인을 찾아갈 수 있게 도와줄 것이란 기대를 품게 되었지요.
결국 저는 갖고 있던 책과 CD를 대부분 처분했습니다. 양이 꽤 많아 한 번에 처분할 수는 없었고 틈 날 때마다 바리바리 싸들고 알라딘 종로점을 찾았습니다. 마음이 애잔하지는 않았지만 제가 나이가 들고 막연히 생각하던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책을 버리는 것은 그동안 제가 품어왔던 우상들을 파괴하는 과정과 비슷했습니다. 한 시절 나의 세계관을 지배했던 작가와 뮤지션들은 더 이상 나의 개인적 공간에 차지할 만한 틈이 없었고 헐값에 다른 주인을 찾아나서게 됩니다. 7막 7장을 쓴 홍정욱이 그랬고, 바람의 딸 한비야가 그랬으며, 사회를 비판하던 패닉과 조PD가 그랬습니다. 내가 이 사람처럼 되어야지 생각했던 사람들은 제게 더 이상 그런 인물들이 아니었습니다. 막연히 동경하던 대상이 사라져버린 느낌은 공허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제게 책임을 부여했습니다. 더 이상 스스로를 누구누구 워너비가 아닌 온전하게 자립해야 하는 개인으로 정의하기 시작한 것일 테니까요.
저는 책과 CD를 처분하는 과정을 통해 비움의 미학을 생각했습니다. 누구를 닮으려는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장점을 받아들여 그 누구의 카피도 아닌 자신만의 색깔과 향기를 내야한다는 사실입니다. 비워내면서 스스로를 살찌우는 것이지요. 책을 팔면서 제 인생의 한 때를 지배했던 예술가들에게 안녕과 작별을 고했습니다. 그 동안 고마웠다, 나는 이제 나의 길을 가겠다, 하지만 당신들이 그리운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때는 또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거다, 인연은 계속될 테니까... 라고 되뇌이면서 말이지요. 아직 내다팔지 못 한 책들이 있습니다. 작가 김영하의 에세이, 소설가 김미월의 단편집, 마종기 시인의 수필 등등. 아마 이것까지 제 곁에서 사라지면 허전한 마음에 갈대처럼 흔들릴까 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가진 모든 책을 팔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때는 다 비워도, 다 잃어도 나는 그대로라는 주관을 가지고 있을까요? 생전에 그런 깨달음을 체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비움의 미학을 실천하러 계속 알라딘 중고서점을 들르겠습니다. ^^
+ ) 내일부터 3박 4일동안 타이완 여행을 다녀옵니다. 블로그 포스팅을 잠시 쉬어야 하지만 그만큼 꽉꽉 채워서 돌아오겠습니다. 비운다고 했다가, 채운다고 했다가, 내리다 말다를 반복하는 장맛비처럼 저도 오락가락하네요.;;
알라딘 중고서점 종로점 입구입니다. 종로 2가 네거리 지오다노 매장 바로 옆에 있습니다. 예전에는 나이트클럽이었다고 하네요. 상전벽해란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봅니다. 사진은 알라딘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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