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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없다?! : 홍명보 감독의 GB팀 발언에 부쳐

 

<영국 지도입니다. 오른쪽 브리튼 섬의 스코틀랜드와 웨일즈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이 잉글랜드입니다. 그리고 왼쪽 아일랜드 섬 북쪽에 노란 지역이 북아일랜드입니다. 브리튼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로 이루어져 있고, 통합 왕국은 여기에 북아일랜드가 포함됩니다. 우리가 흔히 영국이라고 하는 나라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를 합친 이 통합 왕국을 의미합니다.>

 

런던 올림픽이 한창입니다. 대한민국은 여느 때보다 잘하고 있습니다. 단체경기에서는 축구 대표팀의 활약이 눈부십니다. 내일은 브라질과 준결승전을 앞두고 있고, 8강전에서는 영국 단일팀을 꺾었습니다. 8강전이 끝나고 나서 홍명보 감독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인터뷰의 콘텐츠가 인상적이었다기 보다는 인터뷰 내내 영국을 GB팀이라고 칭하는 것이 생소했습니다. 찾아봤더니 이번에 영국은 자국에서 개최되는 올림픽에서 명분을 세우기 위해 축구 단일팀을 구성했습니다. 그리고 자국 팀을 'Team GB'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지난 2011년 아시안컵에서 우리 대표팀이 대회에 임하는 각오를 '왕의 귀환'이라고 부른 것처럼 말이지요. 굳이 상대팀 감독이 이런 별칭을 인터뷰에서 언급해야 하는지는 사실 의문입니다. 지난 베이징 올림픽에서 일본 야구 대표팀은 자국 팀을 감독 이름을 따서 '호시노 재팬'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상대팀이 이런 애칭을 굳이 불러줄 필요는 없습니다. 홍명보 감독은 왜 영국을 굳이 GB팀이라고 말했을까요? 이는 홍명보 감독이 영국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부족하거나 아니면 영국에 대한 이해가 아주 깊어서일 것입니다. 물론 저는 전자의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봅니다.

 

한자 문화권에서 영국은 잉글랜드(England)의 발음만 빌려오는 가차 형식으로 국가명을 받아들이면서 英國(Yingguo)이 되었습니다. 우리말에서는 영국으로 발음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영국은 더 이상 England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18세기 영국의 앤 여왕이 통합 왕국(United Kingdom, UK)을 선언하면서 잉글랜드는 더 이상 나라가 아니라 UK의 일부 지역이 됩니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이 세상 어디에도 잉글랜드라는 나라는 없습니다. 잉글랜드는 브리튼 섬의 가장 큰 일부를 차지하지만 영국이라는 국가와 동의어는 아닙니다. 브리튼 섬은 유럽에서 가장 큰 섬입니다. 굳이 그레이트(Great) 브리튼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스스로를 매우 위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물리적 크기를 강조하기 위한 수사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큰 브리튼 섬' 정도가 됩니다. '큰 브리튼 섬'의 이 '큰(Great)'은 일본 제국주의 시대를 거쳐 우리말에 정착하면서 단순히 물리적인 크기를 넘어서는 의미를 내포하게 됩니다. 영국 제국(the Brithsh Empire)이 아니라 대(大)영제국이라는 말이 익숙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사실 대영제국이나 대영박물관은 제국주의 식민지배를 경험한 우리 입장에서는 반드시 고쳐서 써야 할 표현입니다. 세계 각지를 무력으로 점령했던 나라의 정복욕을 알게 모르게 인정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영국, 영국 제국, 영국박물관이면 충분합니다. 실제로 영국박물관은 원어로 the British Museum이기도 하구요. 

 

통합 왕국의 공식적인 국가표기는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thern Ireland(그레이트 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입니다. 통합 왕국은 잉글랜드 뿐 아니라 '커다란 브리튼 섬'에 있는 다른 나라까지 포함합니다. 브리튼 섬은 잉글랜드와 잉글랜드 서쪽에 있는 웨일즈, 북쪽에 있는 스코틀랜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들은 주권 국가는 아니지만 독립적으로 행정과 교육, 문화 사업을 합니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나라의 지방자치단체나 미국의 주(state)와도 다르다고 할 수 있지요. 나라는 아니지만 나라의 역할을 하는 모호한 개념입니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모두 각기 다르지만 브리튼 섬에 모여 살고 있기에 이들은 모두 British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통합왕국에는 브리튼 섬 왼쪽에 있는 아일랜드 섬의 일부인 북아일랜드가 있습니다. 아일랜드는 1937년 독립하기까지 약 400년 동안 브리튼 섬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아일랜드 지역 대부분이 브리튼에서 독립했지만 성공회나 신교도의 비율이 높았던 아일랜드 북부 지역(Northern Ireland, 북아일랜드)은 아직 통합 왕국의 일부로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커다란 네 개 지역 외에도 브리튼 섬 주변에는 작은 섬이 많이 있습니다. 우표, 화폐 제도, 세법까지 독립해 있는 만 섬(Isle of Man)이 대표적이지요. 이런 브리큰 섬 주변의 자잘한 섬까지 포함한 나라가 바로 통합 왕국입니다. 그리고 우리말로 영국은 이 통합왕국을 가리킨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아래는 실제로 제가 처음 영국에 갔을 때 공원에 있는 사람과 나는 대화입니다.

 

나 : Are you British? 영국인이니?

너 : No, I am Scottish. 아니 나 스코틀랜드 사람이야.

 

사실 그 사람은 Scottish이면서 British입니다. 저렇게 대답한 이유는 British의 정체성보다는 English, Scottish, Welsh, Irish의 정체성을 크게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스코틀랜드 출신(Scottish)에게 잉글랜드 출신(English)이냐고 묻는 것은 큰 실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복잡미묘한 정체성 문제를 덮어두고 큰 범위에서 봤을 때 영국은 동일한 왕권하에 있는 지역을 통칭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개별 주가 독립성을 지키면서 연방법을 준수하고 한 명의 지도자를 대통령으로 인정하는 것처럼 영국 역시 지역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하나의 왕권 하에 통일된 국가를 이루고 있습니다.

 

홍명보 감독의 GB팀 발언은 영국이라는 개념을 혼동해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영국은 잉글랜드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오랜만에 단일팀을 구성한 이번 영국 올림픽 축구 대표팀을 부를 만한 마땅한 명칭이 없는 것이 사실이고 GB팀이라고 칭한 것이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영국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를 통칭하는 표현이라는 것을 상기해보면, 그들이 거창하게 명명한 Team GB도 사실 우리 입장에서는 그냥 영국 팀일 뿐입니다. 대영제국이 아니라 그냥 영국 제국이고, 대영박물관이 아니라 영국박물관인 것처럼 말이지요. 홍명보 감독이 영국과의 8강전 전반이 끝나고 라커룸에 들어가서 우리 선수들에게 "봐, 쟤네 X도 아니지?"하고 말하며 사기를 북돋은 일이 경기 후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하지만 경기 후 그의 GB팀 발언 인터뷰를 보면서 괜한 아쉬움이 드는 것은 왜일까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영국을 꺾은 우리 대표팀이 내일 새벽 브라질마저 시원하게 물리치고 결승에 직행하기를 바랍니다! ^^

 

p.s. 영국의 역사와 구성에 대한 내용은 김인성 작가의 <그대가 꿈꾸는 영국, 우리가 사는 영국>과 <영어의 숲을 여행하다>를 참고했음을 밝힙니다. 영국 노팅엄으로 교환학생을 가기 전 <그대가 꿈꾸는...>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영어의 숲을...>이라는 책이 나온 것을 오늘 알았습니다. 바로 서점에 가서 구입해 반 정도 읽었는데 다 읽고 후기도 남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