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여행 이틀째, 넉넉히 잠을 자고 9시쯤 일어났습니다. 전날 밤, 몸과 마음과 휴대전화 배터리가 모두 방전되었습니다. 매일 아침 전화영어 수업을 하는데 Amanda의 경쾌한 Ebony accent 아침인사를 들을 기회도 놓친 것이지요. 잠을 푹 자서 그런지 수업 한 번 놓친 건 크게 아쉽지 않았습니다. 올림픽 폐막식 때문인지 그 날 따라 아침마당이 매우 늦게 방영되고 있었습니다. 영어 회화를 혼자서 익힌 70대 할머니, 사법시험 공부를 10년 넘게 해서 결국 합격한 50대 아저씨, 5살 때부터 수리부엉이와 같은 새 공부에 빠져서 입학사정관 제도로 대학에도 합격한 20대 초반의 대학생이 나와서 자신의 공부 비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 즐기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스스로에게도 동기 부여가 되었습니다. 아침마당을 보면서 나갈 준비를 했는데 밖을 보니 이게 웬 걸,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출발할 때 비가 많이 왔기에 우산을 준비해 왔지만 본격적으로 여행을 하려고 마음 먹었는데 비가 내리니 복병을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어쨌든 아침 끼니를 대충이라도 때우기 위해 짐을 챙겨나와 숙소 근처의 롯데리아로 갔습니다.
광양 중마터미널 근처의 쭉 뻗은 도로입니다. 사실 광양은 뭔가 잔뜩 기대한 여행자에게는 실망스러운 도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관광안내소 직원 분께서는 우리나라 도시 대부분이 그렇다고 하더군요. 경주같은 천년고도가 아니라면 말이지요.
여행을 계속 할지, 아니면 서울로 돌아갈지 고민의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다가 먹는 게 남는 거다, 비가 와서 구경을 못 할 거라면 광양불고기라도 먹고 가자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점심에 광양불고기를 먹는 사람이 흔치는 않은 지 식당을 찾기가 생각보다 어려웠습니다. 식당을 찾아 배회하던 중 중마터미널 근처에 있는 관광안내소를 발견했습니다.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기에 바로 들어갔습니다. 사람이 많이 오지는 않는지 직원 분께서 당황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래도 당당하게 여행지 안내를 부탁했습니다. 직원 분께서 말씀하시기를 광양은 공업도시라 볼거리가 썩 많지 않다, 그나마 차가 있어야 가능하다, 차라리 버스를 타고 순천을 가는 것은 어떠냐고 하셨습니다. 특히 순천만 생태공원는 다녀온 사람 대부분이 만족한다며 강력 추천했습니다. 순천은 광양에서 버스로 3~40분 정도 걸립니다. 결국 저는 12:10 차를 타고 순천으로 향합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버스를 타고 창 밖을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순천종합터미널에서 찍은 배차 시간표입니다. 사실 시간을 공유하려는 목적보다는, 허가되지 않은 인터넷 게시를 금지한다는 문구가 재밌어서 찍었습니다. 혹시 순천터미널 관계자께서 이걸 보시면 널리 양해해주세요. 상업적인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순천터미널에 도착해 관광안내소를 찾았지만 점심 시간이라 담당자가 없었습니다. 이런 저런 정보를 혼자서 찾아보던 중 식사 중 안내판을 뒤로 돌리니 순천만 가려는 67번 버스를 타면 된다고 적혀 있습니다. 좀 더 기다렸으나 담당자는 올 기미를 안 보이고, 밖으로 나가서 67번 버스 정거장을 찾았습니다. 기사님께 순천만까지 가는지 확인하고 버스에 탑승하니 20분도 안 되어서 순천만에 도착했습니다. 순천만 생태공원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어서 공원 앞에서 안내도를 보면서 탐색을 좀 해야 했습니다.
순천만 생태공원 종합 안내도입니다. 순천만 공원을 샅샅이 보려면 약 3~4시간이 걸립니다. 더군다는 매주 월요일은 갈대열차와 선상투어 선박이 운행을 하지 않으므로 시간을 넉넉히 잡아야 합니다.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정이 되리라 생각되어 공원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 들러서 먹을 거리를 샀습니다. 그래 봤자 김밥과 커피, 음료수가 전부였지만 말이지요. 순천만의 전경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용산전망대까지 올라가야 했습니다. 입구에서 용산전망대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걸립니다. 가는 길이 운치가 있고 농게와 짱뚱어를 볼 수 있어서 지루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간 날은 비가 꽤 내렸기 때문에 몸이 후텁지근해져서 고생을 했습니다.
비가 내리는 순천만 생태공원의 풍경입니다. 순천만 공원은 생각보다 매우 커서 걷기를 좋아하는 분들께 강추합니다. 비 맞으면서 걷는 것도 꽤 운치가 있더군요.
순천만 갈대숲 풍경입니다. 가운데에 흰색 집게발을 들고 있는 농게의 모습도 보입니다. 뻘에 난 수십개의 구멍은 짱뚱어가 드나든 흔적입니다.
위 사진에서 농게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아서 다른 사진 하나를 더 첨부합니다. 순천문학관 가는 길에 찍은 사진입니다. 이렇게 인도에도 농게가 많이 기어다닙니다.
비오는 날 운행을 멈춘 배 두 척의 모습입니다. 나름대로 구도가 괜찮지 않나요? 저 오른쪽 배를 타고 어디 멀리까지 가고 싶다는 허튼 생각을 잠시 해봤습니다.
보조전망대에서 바라본 순천만의 모습입니다. 장관을 보기 위해 고생을 한 보람의 성과가 조금씩 조금씩 나타나는 것 같아 기뻤습니다.
두둥! 용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순천만 전경입니다. 이 풍경을 가슴에 담기 위해 비오는 날 우산을 던져버리고 비를 맞으며 한 시간을 걸었습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내 마음의 때도 씻겨 내려가기를 바랐습니다.
안 그래도 많지 않은 머리숱이 더 없어보이는군요. 중반쯤부터 제 안의 야성을 일깨워서 우산을 던져버렸습니다. 두 팔이 자유로워지니 생각과 마음도 자유로워졌습니다. 제 표정은 그런 자신감을 보여주고 있네요. ^^
용산전망대에서 내려와서 생태공원과 붙어있는 순천문학관으로 향했습니다. 순천은 우리나라 문학계에서 한 획을 그은 김승옥 작가가 자란 곳입니다. 그가 문단에 데뷔했을 때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평단의 찬사를 받은 것은 널리 알려진 일입니다. 특히 대표작인 무진기행의 배경인 무진은 가상의 공간이긴 하지만 그가 자란 순천을 형상화했다고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날은 문학관이 쉬는 날이었습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발걸음을 돌려야 했습니다. 무작정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터미널로 돌아오는 길에 무진기행에 나오는 특산물 안개의 모습을 사진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날이 우중충해서 분위기가 더 잡힌 것 같기도 하고요.
무진기행의 안개를 떠올리며 마지막으로 사진을 한 장 남겼습니다. 원래는 늪을 찍으려고 한 건데, 우중충한 하늘과 뿌연 안개에 더욱 눈길이 가네요.
이렇게 저의 무작정 여행은 끝났습니다. 무계획적으로 떠난 여행이지만 마지막에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을 떠올리며 마무리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번 여행기의 마지막은 무진기행의 한 대목으로 끝내려고 합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을 떼어놓았다.』
한국문학, 무진기행, 작가 김승옥을 사랑하는 분들께 순천만 여행을 강력 추천합니다!
<무작정 여행 2일차 경비>
롯데리아 햄버거 + 셰이크 : 3,700원
미니스톱 문어바 + 커피 : 2,000원
동광양 - 순천 버스비 : 3,200원
순천 왕복 시내버스비 : 2,000원
김밥 + 아이스식혜 + 쿠키 : 2,720원
순천만 자연생태공원 입장료 : 2,000원
생태공원 사물함 이용료 : 500원
맥주 + 콜라 + 생수 + 스낵 : 3,680원
순천 - 서울 고속터미널 버스비 : 18,500원
순천종합터미널 이삭토스트 : 2,400원
정안휴게소 떡볶이 : 3,000원
버거킹 아메리카노 : 1,000원
합계 : 44,7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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