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처음으로 나라 밖을 가 본 건 2004년 여름이었습니다. 입대를 앞두고 있던 우울한 어느 여름날, 배낭여행이란 걸 하기로 했습니다. 특별한 의미와 목적이 있던 것은 아니었고 비행기를 오랫동안 타보고 싶은 소박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비행기를 오래 타고 가서 여러 나라를 볼 수 있는, 가격 대비 성능비가 높은 대륙은 단연 유럽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런던 인, 빠리 아웃 유럽여행을 시작했습니다. 가는 길에 일본을 잠시 거쳐 하룻밤을 공짜로 보내는 호사를 누리기도 하면서 말이죠. 비행기도 오래 탔지만 기차도 참으로 오래 탔습니다. 유레일패스의 장점을 십분 활용하며 10개국 이상을 무리해서 찍고(!) 돌아왔습니다. 혈기왕성한 시절의 여행이었지만 외국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던지 하는 짜릿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행 가기 전, <비포 선라이즈> 같은 영화를 보지 않은 건 천만다행이었지요. 다만 빠리에서 마지막 일정을 소화하면서 개똥을 밟은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후 빠리는 제게 개똥이 널린, 이미지와 실상이 전혀 다른 도시로 남게 되었지만 배낭여행의 소득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영어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이죠. 투박한 영국 악센트에 매료되어 군생활을 하면서 영어 공부를 병행했습니다. 제대 후에는 영국으로 교환학생을 가겠다는 소년의 원대한 야망을 가슴에 품고서요. 전역을 하고 갈고닦은 영어 실력을 시험하러 유럽으로 다시 떠나게 됩니다. 노팅엄(미국 유학 하신 분들, 나링햄이 아닙니다!)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1년 동안 공부하면서 방학 때마다 타지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영국의 학제는 특이해서 학기는 둘이지만 방학은 세 번이었습니다. 겨울방학이 짧은 대시 한 달 가까운 부활절 방학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신기한 건 방학 때마다 개똥철학의 나라로만 각인되어 있던 프랑스가 제 삶에 끼어들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새학기가 시작하기 전인 여름방학 때의 일은 아직도 생생하군요.
영국에 도착하기 전 독일에 들러 워크캠프라는 국제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다양한 나라에서 모여든 젊은이들이 숙식을 함께 하며 작은 독일 마을의 유적지 문헌을 자국의 언어로 옮기는 작업이었습니다. 뭔가를 열심히 한 것 같기는 한데 일한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한 달 가까이 지내는 동안 제가 생애 첫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었기 때문이겠지요. 그것도 국적과 문화적 배경이 다른 개똥철학의 나라 프랑스 여자를 말입니다. 그의 이름은 로라(Laura)였는데 미모가 꽤 뛰어났기에 우리 커뮤니티에는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저 말고 한 명 더 있었습니다. 바로 체코에서 온 젊은 친구 앤드류(Andrew)가 저의 경쟁자였죠. 앤드류와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인 끝에 로라의 마음을 얻은 건 저였습니다. 저는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런저런 장난을 많이 쳤고 이 작전이 주효했습니다. 진지함을 무기로 한 앤드류는 처음부터 저의 경쟁상대가 아니었습니다. ^^
검은 털모자를 쓰고 있는 게 저고 그 옆이 저의 첫 번째 여자친구 로라입니다. 제 앞에 앉은, 시무룩한 친구가 앤드류고 그 옆은 우크라이나 출신의 나탈리입니다. 나탈리는 이런 사랑의 역학관계를 아는지 모르는지 마냥 밝은 표정을 짓고 있네요. ^^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의 연애였지만 장황하게 첫 번째 여자친구 이야기를 꺼낸 것은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때문입니다. 재기발랄한 영화감독 우디 알렌은 이번 영화에서 빠리라는 공간에 세기를 뛰어넘는 위대한 예술가들을 모두 불러냅니다. 예술적 소양이 뛰어나지 않은 제가 보기에도 숨이 막히는 드가, 달리, 고갱, 피카소와 같은 미술가에서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T.S. 엘리엇과 같은 작가까지... 한마디로 이 영화는 아티스트 종합 선물세트와 같은 작품(!)입니다. 길(Gil)이라는 주인공을 통해서 내가 만약 위대한 예술가들을 직접 만난다면 무슨 얘기를 하고, 어떤 질문을 할지 상상해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재밌는 건 영화에서 만난 위대한 예술가들은 모두 자기 이전의 시대를 황금기라고 생각하고 과거의 시대를 동경한다는 것이지요. 시간이 지나 전설이 된 예술가들도 자신의 삶에서는 고뇌하며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는 해석이 흥미롭습니다. 우석훈 교수가 지은 책 제목처럼 위대한 예술가도 개인으로서는 결국 '1인분 인생'을 살다가 간 것이지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면서 저는 마치 한밤에 빠리를 거닐며 위대한 예술과들과 연애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심야에 한 번 더 보고싶은 마음도 있네요. 이번 여름, 저처럼 빠리까지 갈 엄두가 안 나시는 분들은 <미드나잇 인 파리> 보면서 그 때 그 시절 황금기의 빠리로 떠나보는 것도 가격대비 성능비가 아주 뛰어난 여행법이 될 겁니다. ^^
영화에 고흐는 등장하지 않지만 포스터에 <별이 빛나는 밤에>가 들어간 점도 흥미롭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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