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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마시고 사랑하라

사실 이안 감독을 잘 알지 못 했습니다. 그가 미국 주류 영화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중화권 감독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연출한 영화 <색, 계>, <브로크백 마운틴> 등을 재미있게 봤지만 그것이 감독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두 편 모두 영국에서 교환학생을 하던 시절 어두컴컴한 기숙사방에서 노트북으로 본 것이어서 그런지도 모르지요. 그는 제게 뛰어난 동양 연출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이안 감독의 생애를 찾아보고 그의 필모그래피를 꼼꼼히 살피게 된 건 순전히 이번 여름 계획하고 있는 여행 때문입니다.

 

얼마 전 본의 아니게 사람들 앞에서 전문가 행세를 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제가 회사에서 하고 있는 업무와 관련된 내용을 강연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거든요. 엄밀히 말하자면 다른 사람이 일정이 안 된다고 해서 대타를 뛰게 된 것이죠. 새로운 도전이 되겠다, 피하지 말자는 마음가짐으로 받아들인 제안은 약속된 날짜가 다가올 수록 엄청난 부담이 되었습니다.

 

사실상 첫 번째 강의, 그리고 그것도 3시간이라는 시간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제는 '국제 통상환경의 변화와 미국의 통상정책', '한-미 FTA 발효 후 우리 기업의 대응전략'이었습니다. 준비를 하면서 오히려 제가 공부가 되었습니다. 3시간이라는 강연 시간은 대충 얼버무려서는 안 된다는 압박감으로 작용했고 저는 여러가지 시나리오를 짜면서 '강연 수락 후 나만의 대응전략'을 구상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강연 전날 시간이 1시간 줄어서 2시간만 해도 된다는 담당자의 전화는 마치 제게 구원과도 같았습니다. 게다가 강연료는 처음 얘기한 대로 주겠다는 얘기는 보너스였습니다.

 

두근반 세근반 진땀을 흘리며 ITO, GATT, WTO, FTA에 대한 독백을 두 시간 동안 이어나갔습니다. 중간중간 돌발 질문이라는 복병을 만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국방부 시계는 돈다'는 진리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두 시간이 생각보다 빨리 흘러갔고 담당자는 원천징수세를 제한 강연료를 현장에서 바로 주었습니다. 조금 길어졌는데 그것이 바로 제가 이안 감독을 다시 만나게 된 계기입니다. 번외소득이라고 쓰고 꽁돈이라고 읽는 이 적잖은 금액을 가지고 뭘 할까 고민합니다.

 

술이나 마실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고 저축은 아니야 하는 생각은 더 많이 들었습니다. 술과 저축과의 결투에서 여행이라는 새우가 문득 등장했고, 새우는 등 대신 잭팟을 터뜨렸습니다. 두 번째 싸움은 새우와 새우의 대결이었습니다. 태국산 새우와 대만산 새우, 일본산 새우가 각각 자신을 선택해 달라며 요염한 자태를 뽐내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산 새우는 올해 두 번이나 선택을 받았기에 자연스럽게 아웃되었고 한 번도 가 보지 못 한 두 나라, 태국과 대만이 선택의 저울에 올라가게 됩니다. 태국산 새우가 잘 알려진 대로 매운 맛을 선보이며 대만산 새우를 압도하는 듯 했으나, 초반의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대만산 새우의 은은한 맛에 무릎 꿇어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번 여름휴가의 종착지는 대만, 정확히 말하자면 타이완으로 결정됩니다.

 

타이완으로 결정했지만 타이완에 대한 사전 정보는 거의 없었습니다. 타이완을 가 본 누나는 심심하다며 오히려 비추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항공권도 샀고 숙소도 예약을 했기에 타이완의 장점을 찾아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점에 가서 타이완에 대한 책을 쭉 훑어보면서 어설픈 여행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알고 봤더니 타이완 영화를 두 편이나 봤습니다. 둘 다 소극장에 일부러 찾아가서 본 영화인데 바로 <청설>과 <타이베이 카페 스토리>입니다. 둘 다 영화를 보고 좋은 기억이 있었기에 여행지 선택에 대한 안도감을 늦게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중화권에서 맛의 천국은 홍콩이 유일한 줄 알았던 저는 타이완 역시 그에 못지 않은 곳이라는 정보를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가장 직접적으로 그린 영화가 이안 감독의 <음식남녀>라는 글을 읽게 되죠. <음식남녀>는 식감을 점점 잃어가는 나이든 홀아비 요리사와 그의 세 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무엇보다 이안 감독은 영화에서 타이완 음식과 요리 과정을 정말 맛있게 그려냅니다. 식감을 잃어가던 홀아비 요리사는 사랑을 통해서 미각을 회복하고 그의 세 딸 역시 쉽지 않았던 각자의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이 은근하지만 영화가 끝나고도 여운이 남습니다. 이안 감독은 인생이란 결국 먹고, 마시고, 사랑하는 과정이 전부라는 생각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얘기했습니다. <음식남녀>의 영어 제목이 <Eat, Drink, Man, Woman>인 것을 봐도 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즘 들어 자꾸 드는 생각도 우리 삶의 정수는 맛있는 것 먹고, 좋은 것 마시고, 진실한 사랑과 연애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2주만 있으면 저는 타이완에 갑니다. 과연 무엇을 먹고 마시고 누구를 사랑하게 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