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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연출의 힘, <더 레이디>

지난 주말에는 오랜만에 애인과 영화를 한 편 봤습니다. 가족이 모두 통신사 VIP 회원이라 한 달에 세 편 영화를 공짜로 볼 수 있습니다. 매달 영화를 골라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주말에 본 영화는 뤽 베송 감독의 <더 레이디>였습니다. 아웅산 수 치 여사의 삶을 그린 영화입니다. 뤽 베송 감독이 연출했습니다. <그랑블루>, <레옹>, <택시> 등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독인 그는 우리나라에서도 적잖은 마니아 층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연출가입니다. <더 레이디>는 그의 연출력을 잘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아웅산 수 치가 버마의 민주화 영웅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면서도 그의 인간적 고뇌를 놓치지 않습니다.

 

 

아웅산 수 치 역의 양자경(왼쪽)을 연기 지도하고 있는 뤽 베송 감독

 

 

아웅산 장군의 딸로 영국인 남편과 결혼해서 아이를 둘 낳고 옥스포드에서 평범한 삶을 살던 그는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귀국했다가 버마 민족민주동맹을 이끄는 지도자가 됩니다. 가족이 있는 영국으로 돌아가면 다시는 버마로 오지 못 할 것을 알기에 그는 갖은 회유에도 버마를 떠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버마 독재 군부는 결국 그를 가택연금하고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는 동안 그의 영국인 남편 마이클 에이리스는 전립선 암에 걸려서 투병 생활에 들어갑니다. 죽음을 앞두고 에이리스는 버마에 입국해 수 치를 마지막으로 보고싶어 하지만 독재군부는 이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남편의 임종마저 지키지 못 한 채 수 치는 가택연금 상태에 다시 돌입합니다. 시간이 흘러 그의 가택연금은 해제되었고 민족민주동맹은 의회의 다수석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아웅산 수 치는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이렇게 서술한 아웅산 수 치의 삶은 점점 해피엔딩을 향해 가는 과정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아웅산 수 치는 가택연금된 상황에서도 영웅의 경구를 써서 붙여놓고 의지를 굽히지 않습니다. 사진에서는, 말콤 엑스의 명언 "자유와 평화는 떼어낼 수 없다. 왜냐하면 자유가 없다면 평온할 수 없기 때문이다. (You can't separate peace from freedom because no one can be at peace unless he has his freedom.)"는 경구를 들고 있군요.

 

 

영화는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버마 민주화의 영웅인 아웅산 수 치의 삶이 아닌, 한 남자의 아내이자 두 아들의 어머니로서 그의 고뇌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질문을 던집니다. 어느 순간 우리의 어머니 혹은 아내가 독립 투사로 변신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면 우리는 어떤 느낌일까요? 영화는 거대 담론 이면에 숨겨진 미시적인 부분을 놓치지 않고 짚어냅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뤽 베송 감독이 왜 거장이라 불리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역동적인 연출로 널리 알려졌지만 이런 잔잔한 영화에서도 그는 섬세한 시선을 잃지 않습니다. 자칫 단조로운 인물의 일대기로 끝날 수 있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130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이야기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감독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 연출이라고나 할까요? 감독은 관객이 영화를 보는 내내 자신의 이름을 떠올리기 보다는 아웅산 수 치라는 인물에 집중하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그 영화를 떠올릴 때면 감독의 무게가 비로소 느껴집니다. 또한 이 영화 완성도의 바탕에는 양자경이라는 말레이시아 출신 배우의 훌륭한 연기가 있습니다. 특히 아시아 사람이 구사할 수 있는 영국식 악센트가 어떤 것인가 하는 전형을 보여준 양자경의 대사 하나 하나는 아웅산 수 치의 그것과 매우 흡사해서 보면서도 놀랐습니다. 배우가 얼마나 노력과 준비를 많이 했을지 짐작이 갔습니다.

 

 

양자경(왼쪽)은 영화에서 아웅산 수 치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합니다. 

 

뤽 베송의 <더 레이디>는 거장의 작품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 영화였습니다. 별점으로 평가한다면 ★★★★☆을 주겠습니다. 그렇다면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해서 연일 화제가 되고 있는 <피에타>는 어떨까요? 어제 <피에타>를 봤습니다. 또다른 거장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 이야기는 내일 [거장 對 거장] 하편에서 이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