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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Y 스타식스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시작한 서울 생활은 신기하면서도 낯설었습니다. 소도시(라 쓰고 시골이라 읽는 곳)에서 대중문화, 특히 영화의 혜택을 많이 누리지 못했던 저에게 서울의 영화관은 별천지같은 세상이었습니다. 단관으로 개봉하는 극장에서만 영화를 보다가 멀티플렉스라고 불리우는 휘황찬란한 극장에 갔을 때 느낀 위압감은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마치 초등학생 때 서울에 있는 친척집에 놀러와서 처음 벤츠를 봤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어렸을 때 가장 좋은 차는 그랜저인 줄 알고 살던 저는 방학 때 서울에 왔다가 벤츠라는 그랜저보다 좋은 차가 서울에는 아주 많다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습니다. 아직도 사촌 형은 저를 보면 '벤츠와 그랜저' 얘기를 합니다.

 

특히 서울에는 밤에 영화를 세 편 연속으로 보여주는 극장도 있다는 얘기를 듣고 내색할 수 없었지만 '아, 서울은 정말 신기한 동네구나'하고 곱씹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스타식스 정동이라는 극장은 당시 영화를 좋아하는 대학생들에게 큰 인기였습니다. 하지만 얼치기 영화팬이던 저는 결국 스타식스를 한 번도 가 보지 못했습니다. 정동 경향신문사 건물에 있던 스타식스는 심야영화의 황금기를 추억으로 간직한 채 '시네마 정동'으로 이름을 바꾸더니 재작년 문을 닫고 연극 중심의 문화공연장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왠지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장황하게 스타식스 얘기를 꺼낸 이유는 대학 시절 해보지 못 한 영화 세 편 연속으로 보기를 제가 어제 처음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퇴근 후 회식도 취소되고 뭘할까 고민하다가 영화를 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코엑스에 사무실이 있다는 건 이런 면에서 행운이죠. 시간표를 살펴 보다가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을 보고 싶었지만 너무 오래 시간을 때워야 했습니다. 차선으로 택한 영화가 <캐빈 인 더 우즈>입니다. <캐빈 인 더 우즈>는 공포 영화를 가장한 미국식 뒤틀기의 미학(?)을 제대로 보여줍니다. 관객이 조마조마하면서 다음 장면을 기다리고 있으면 감독은 공포 대신 이런저런 영화를 패러디한 장면을 빵빵 터뜨려줍니다. 미국 문화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영화의 의미와 감독의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제가 느낀 것 이상으로 유쾌한 영화가 될 것입니다. 영화는 꽤 흥미로웠지만 끝나고 나서 뭔가 아쉬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밀크티를 마셔야 단 맛을 느낄 수 있는데, 탈지우유가 없어서 쓴 홍차를 마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나 할까요? 저에게는 탈지우유와 같은 문화적 배경지식이 없었던 것이지요.

 

내친 김에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까지 보기로 했습니다. 혼자서 게이 영화를 본다는 것에 괜히 쑥스럽기도 했지만 용기를 냈습니다. 영화는 우리 사회에서 동성애자로 살아간다는 것을 유쾌하면서 발랄하게 그리고 있었습니다. 제 주변에 이미 존재하고 있을 동성애자에 대해 무심코 이성애자의 시각을 강요하지는 않았나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영화는 이것을 결코 무겁게 그리지 않았지만 영화관을 떠나는 제 발걸음은 가볍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무거워진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고 한 편의 영화를 더 보게 됩니다.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영화, 마음 편하게 그 장면(the scene)만을 기다리며 볼 수 있는 영화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영화가 <후궁>입니다. 예전에 <방자전>을 보았기에 영화의 줄거리나 내용보다는 조여정의 노출이 기다려졌습니다. <후궁>에서 조여정의 연기는 훌륭했지만 <방자전>과 크게 달라진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후궁>에서 제가 기대한 것이 별로 없어서 영화를 보면서 적극적으로 몰입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조여정의 몸매는 여전히 훌륭했고 밤늦은 영화러시를 마감하기에는 적절했습니다.

 

가까스로 영화관을 나왔을 때는 이미 자정이 넘었고 저는 지하철과 버스 환승 신공을 써서 가까스로 집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우연히 하게 된 영화 연속 보기, 저는 이것을 'DIY 스타식스'라고 이름 붙이고 싶습니다. 스타식스가 없어지고 나서 심야영화 연속상영 패키지를 시행하는 곳도 쉽게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했습니다. 스타식스는 없어졌지만 내가 만들어가는 심야영화 패키지 'DIY 스타식스'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다가오는 프라이데이 나잇, 저와 'DIY 스타식스'하러 가실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