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엑조티시즘(Exoticism)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전공인 사회학 시간은 아니었고 교양으로 듣던 영어 시간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때 대표적인 예로 들었던 작품이 고갱의 <타히티의 연인들>이었습니다. 백과사전에서 엑조티시즘을 찾아보면 '이국의 정취에 탐닉하는 경향'이라고 나옵니다. 쉽게 말하자면 외국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환상을 말합니다. 누구에게나 외국은 어느 정도 이상향으로 작용하는 게 있고 또 그게 없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팍팍할지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힙니다. 미지의 세계라는 표현은 엑조티시즘을 내포하고 있는 아주 적절한 말입니다. 미지의 세계는 동경의 대상일 뿐 아니라 도전의 상대이기도 할 테니까 말이지요. 제가 가보지 못한 나라 중 미지의 세계는 어디일까요? 언뜻 떠오르는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인도입니다. 인도가 풍기는 특유의 신비감 뿐 아니라 회사에 들어와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인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지요.
인도에 엑조티시즘을 품고 있는 사람은 저 뿐만이 아니었나 봅니다. 지난 주말 밤, 영화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을 보았습니다. 이 영화는 영국을 떠나서 인도의 한 호텔에 모인 다수의 영국 노인의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기대를 품고 온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은 홈페이지의 광고와는 달리 먼지가 풀풀 풍기는 전형적인 인도의 삼류 호텔입니다. 항의해봤자 씨알도 안 먹힐 인도에서 몇몇은 적응해서 살아남기를 택하고 다른 몇몇은 자신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는 방법을 택합니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영화를 보는 내내, 국적과 나이를 떠나서 하루하루를 살아낸다는 누구에게나 힘든 것이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에 에블린(주디 덴치)는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씁니다. 삶의 풍파를 겪은 노인이 읊어내는 독백이 아직 젊다고 생각하는 저의 가슴을 절절히 울렸습니다.
51일차
진정 유일한 실패는 시도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성공의 방법은 절망을 어떻게 견뎌내는가에 달려있다. 우리 모두는 여기에 왔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시도했다. 우리가 너무 늙어 변화하기 어렵다고 느낀다면 힐난받아야 하는가? 다시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한다는 절망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도?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최선을 다한다.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
Day 51
The only real failure is the failure to try. And the measure of success is how we cope with disappointment, as we always must. We came here and we tried, all of us, in our different ways. Can we be blamed for feeling that we are too old to change? Too scared of disappointment to start it all again? We get up in the morning. We do our best. Nothing else matters.
산다는 건 무엇일까요? 그리고 성공과 실패, 환희와 절망은 무엇일까요? 오늘도 우리 모두는 하루를 살아냈습니다. 늘 그렇게 흘러가는 하루하루라도 그것을 무사히 살아냈다는 것은 한편으로 기적입니다. 지치고 힘든 하루를 마감하고 집에 가는 퇴근길,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의 주인공들은 우리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말을 건넵니다. 오늘 하루도 용케 살아내셨군요? 그것 말고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이죠. ^^
'날마다 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에타>의 김기덕은 거장 자격이 있는가 (0) | 2012.09.12 |
---|---|
보이지 않는 연출의 힘, <더 레이디> (0) | 2012.09.11 |
한밤의 빠리 연애 (0) | 2012.07.13 |
DIY 스타식스 (0) | 2012.07.11 |
먹고 마시고 사랑하라 (0) | 2012.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