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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의 쓴 맛을 보여주마 : 신세계

조직에는 흔히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국어사전에는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여러 개체나 요소를 모아서 체계있는 집단을 이룸, 또는 그 집단'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흔히 조직을 말할 때, (폭력) 조직을 떠올립니다. 사회가 워낙 팍팍해지다 보니까 의미가 확장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조직의 모습은 이런 것입니다. 모두가 웃고 있으나, 그 웃음 뒤에는 각기 다른 사정과 생각이 꿈틀대고 있을지 모릅니다. 조직이란 울타리 안에서 쉽게 드러내지 못 할 뿐이지요.

 

 

영화 <신세계>는 조직과 (폭력) 조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영화의 매개라고 할 수 있는 이자성(이정재 분)은 경찰입니다. 하지만 조직의 사정 상 그는 폭력조직 '골드문'에 잠임해 프락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신참인 그가 상사인 강 과장(최민식 분)의 지시를 거역할 방법은 없지요. 어느새 이자성의 특별한 파견근무는 10년이 다 되어 갑니다. 그 동안 그는 골드문의 넘버2인 정청(황정민 분)의 절친이 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갈 수록 이자성은 경찰 공무원인 실제 직업과, 폭력 조직의 간부라는 위장 신분 사이에서 극심한 정체성 혼란을 느낍니다. 골드문의 넘버1이 사망하자 정청은 호시탐탐 회장 자리를 노리고 절친인 이자성에게 심적으로 의존합니다. 전형적인 경상도 사나이의 의리를 보여주며 마음을 사는 것이지요. 한편 이자성의 진짜 조직은 그의 프락치 신분을 백퍼센트 활용합니다. 강 과장은 춘추전국시대가 된 골드문의 내부 사정을 이자성을 통해 접수하려고 애씁니다. 이자성은 소속 부서의 냉혹함과 파견 조직의 따뜻함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고요. 영화는 이런 기본 구도를 바탕으로 속도감 있게 진행됩니다.

 

(왼쪽부터 강 과장과 이자성, 그리고 정청) 이자성은 회사 선배와 파견조직 절친 사이에서 고민합니다. <신세계>는 화려한 액션과 배우들의 명품 연기도 볼 만하지만, 근본적으로 선택을 강요하는 조직의 논리에 저항하는 직장인의 애환을 그린 영화입니다.

 

 

신세계는 액션만 보면 홍콩 느와르 형식을 빌려왔지만, 사실 직장인의 애환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자성은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는 조직에 실망하지만 손쉽게 회사를 던져버리고 다른 조직으로 투항할 수도 없습니다. 꼭 선하지 않은 폭력 조직이어서가 아닙니다. 강 과장과 이자성이 속해있는 경찰 조직과 정청의 폭력 조직은 경쟁 관계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해야 하는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자성은 소속 조직을 배신하고 경쟁사로 맘편히 이직할 수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이자성의 상황은 보편적인 직장인의 고뇌와 맞닿아 있습니다. 회사를 다니는 사람이면 누구나 사표를 쓰고 싶은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조직의 쓴 맛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조직을 벗어나면 냉혹한 사회가 쓴 맛을 보여주려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자성은 그나마 능력을 인정받아 파견 조직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습니다. 하지만 우리네 직장인 중에서 이자성과 같은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조직의 쓴 맛을 묵묵히 견디며 하루하루 버티는 게 샐러리맨의 애환이지요.

 

이자성은 '조직의 쓴 맛'을 대변하는 상사 강 과장에게 저항합니다. 하지만 강 과장 역시 거대 조직의 일원일 뿐입니다. 폭력조직 골드문을 처단하는 '신세계' 프로젝트를 완수한 강 과장은 담담하게 조직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자성은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자신을 보호해주지 못하고 '쓴 맛'만 보여주는 조직에 복종하고 남느냐, 경쟁사로 이직해 새로운 조직의 '쓴 맛'을 보여주느냐... 그의 선택은 스포일러가 될까봐 여기서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조직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면서 '멋진 신세계'를 기대한다는 것은 요원한 일일까요? 정녕 그런 조직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의 영어 원제는 'Brave New World'입니다. 어쩌면 신세계를 갈망하는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거대한 조직에 저항하는 용기일 수도 있습니다.